[서울시 하이서울뉴스] 스펙이 없는데 잘 나간다는 말에 혹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그에게는 스펙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손가락이 퉁퉁 붓도록 그림을 그려온 수많은 밤낮이다. 목표가 있다면 길은 한 가지가 아니다. 학교도 스승도 없이 그야말로 맨땅을 박차고 일어난 그에게 자, 무엇부터 물어볼까.

짐작하건데 그는 낙서쟁이였다. 왜 있지 않는가, 교과서와 노트 구석의 빈자리에 항상 깨알 같은 그림을 채워 넣는 애들. 게다가 그의 그림은 나름 정평이 나 소수의 마니아층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 친구들 중의 하나가 훗날 그가 돈이 없어 공부를 포기하려 했을 때 선뜻 자신의 저금을 털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친구의 도움을 받아 처음 서울생활을 시작한 곳이 홍대였다. 매주 열리는 프리마켓에 일주일 내내 공들여 만든 노트와 엽서를 들고나가 팔았다. 그렇게 번 돈은 다시 노트를 만들 종이를 사는데 쓰였고 생활비는 최소한으로 줄였다. 한 달 먹을 음식이라고 산 것이 고작 쌀 한 봉지, 달걀 한 판, 간장 한 병, 고추장 한 팩. 어쩌다 먼 곳에서 온 친구와 먹는 치킨 한 마리도 부담이 될 지경이었다.

"학원은 비싸니까 도서관에서 빌린 책으로 공부했어요. 무리한 작업으로 손이 부어 그림그리기 힘든 날은 책을 보고, 눈이 아파 책을 보기 힘들어지면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그렇게 하루 15~18시간을 보냈어요. 부족한 재능을 메울 수 있는 건 시간과 노력밖에 없으니까요. 노력이 거듭되면서 제 그림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기회도 함께 찾아왔고 처음으로 F&G디자인에 취업하게 되었죠."

처음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내면서 솔직히 큰 기대는 할 수 없었다. 학력은 고졸이 전부, 미술 전공도 하지 않았고 취업자들이 모두 한 두 개씩은 가졌다는 자격증도 토익이니 토플이니 하는 영어점수도 없었기 때문. 그런데 연락이 왔다. 뽑힌 이유는 단순했다. 그의 그림이 마음이 들었다는 것.

그 후 한 번 더 자리를 옮겨 현재 그는 이투컬렉션의 앙시앙브랜드 팀장이다. 그동안 다이소의 캐릭터인 다이소걸과 굿네이버스의 굿퍼펫 일러스트 디자인 등을 해왔다. 작년에는 디자인문구실무라는 책도 출간했다. 올해 11월에도 두 번째 책이 나올 예정이다.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시간을 들여 차분하게 할 말을 다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무엇 하나 그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사실 그는 류머티즘을 앓고 있다. 하루종일 고되게 그림을 그리던 시절부터 얻어진 불편한 현실이다. 그런데도 요즘 행복하다고 한다. 아침에 출근해서 좋아하는 그림을 실컷 그리며 돈도 벌고 있지 않느냐는, 지극히 간단한 계산이다.

Q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이력서에 무엇보다 중요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회사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이력서에 줄줄 써내려가는 자격증은 생각보다 취업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아요. 네이티브에게 영어성적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디자이너에게 자격증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문구 디자이너로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포트폴리오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해요. 취업준비를 위해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공부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들은 많습니다. 그 소중한 시간을 자격증이 아닌 진짜 실력을 보여 줄 수 있는 포트폴리오에 집중하세요. 포트폴리오가 통과 되지 않아서 열람되지도 않고 버려지는 이력서도 많으니까요.

또 자기소개서를 성의 있게 적어주세요. 내가 이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이일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요. 저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로 시작하는 틀에 박힌 자기소개서 말고요. 일을 정말 좋아하는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적었다면 그 이유와 근거도 설득력있게 적어야죠. 증명되지 않은 열정은 허언이고 근거 없는 자신감은 당당함이 아닌 나태함입니다. 열정과 자신감은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닌 하루하루 쌓아온 노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노력을 했다면 그 노력을 적어주세요. 그런 사람을 어떤 회사가 싫다고 할까요.

Q 대기업으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그저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이 좋았어요. 조건보다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교감이 중요하다 싶었거든요. 좋은 기회였고 고마운 조건이었지만 선택에 후회는 없어요.

Q 어떤 직업이건 성공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할 것 같은데, 요즘 따로 공부하는 것이 있나?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5년 전쯤만 해도 스스로 프로그램을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참 바보 같았죠.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요. 잘하는 게 아니라 그저 알고 있을 뿐이라는 걸요. 100m달리기 선수가 달리는 거 몰라서 매일 달리는 게 아니잖아요. 디자이너도 같다고 생각해요.

Q 현재 우리나라의 문구 디자인 시장은?

문구라는 한 가지 영역이 아닌 두 가지 이상의 영역이 섞여서 함께 발전해 나가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디자인 문구의 경계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팬시 가방을 만드는 회사는 문구회사일까요, 패션회사일까요? 답이 쉽지 않잖아요.

Q 문구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조언은?

간절함의 크기만큼 꿈은 가까워진다. 참 오랫동안 제 책상 위에 붙어있었던 말이에요.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스스로를 믿고 다시 돌아가기 싫을 만큼의 혹독한 시간을 묵묵히 이겨내 주세요. 그렇게 한다면 세상이 먼저 여러분을 알아봐 줄 거예요, 반드시.

우리는 취업과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전략을 이야기한다. 그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책을 가져다 쌓는다면 산을 이루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자. 내가 과연 남에게 보여줄 무언가가 제대로 있기는 한 걸까. 묵묵히 실력을 쌓았던 시간이 얼마나 있었는지 되돌아보자. 기본이 제대로 되어있다면, 우보명 디자이너의 말처럼 당신은 곧 눈에 띄게 되어있다. 그러니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는 말 안해도 알 것이다.